일상

아복기포 불찰노기 / 구휼미 단상

날다블 2020. 12. 29. 23:55
반응형

 

아복기포 불찰노기 / 구휼미 단상

 

정약용이 편찬한 속담집 <이담속찬(耳談續纂)>에 '아복기포 불찰노기(我腹旣飽不察奴飢)'라는 구절이 있다.

 

'내 배부르니 종의 밥 짓지 말라 한다'라는 속담을 한역한 것으로, 좋은 형편이나 처지에 있는 사람은 남의 딱한 사정을 알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중학교 때인지 고등학교 때인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한문 시간에 배웠던 속담인데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마음에 뚜렷이 남아 있는 구절이다.

 

이 속담이 요즘도 한문 교과서에 나오는 것을 보면, 시대는 달라졌어도 예나 지금이나 학생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가치는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예전에는 상전이 밥을 먹고 남겨야 종이 먹었다고 한다.

 

종의 몫을 남기지 않고 상전이 다 먹기라도 한다면, 종은 밥을 다시 해야 먹을 수 있는데, 이미 배가 부른 상전은 밥을 왜 또 하느냐고 할 때의 상황을 표현한 말이리라.

 

이런 상황은 상전과 종이라는 신분제도가 존재하지 않는 현대 사회에서도 조금은 다른 양상으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타인에 대해 유독 무관심한 사람은 의도하지 않아도 자칫하면 배부른 상전이 될 수 있다.

 

예를 들면, 숯불구이 고깃집에 가서 식사할 때면 대개 굽는 사람과 먹는 사람으로 나뉘는데, 타인에 대한 관심보다 고기에 대한 관심이 더 큰 사람은 배부른 상전이 될 가능성이 아주 높다.

 

고기 굽는 사람이 굽기 바빠 겨우 몇 점 먹을 때, 먹기에 주력한 사람의 배는 이미 차 있을 가능성이 높다.

 

추가 주문 얘기가 오갈 때, 그 배부른 사람이 손사래를 치며 이걸로 충분하니 더 주문 안 해도 된다고 하면 최악이다.

 

타인에 대한 무관심이 무례함을 낳는 순간이자, 남의 굶주림을 살피지 못하는 이기적인 상전으로 전락하는 순간이다.

 


 

'아복기포 불차노기'를 뒤집어 생각하면 배를 곯아 본 적이 있는 사람은 남의 굶주림을 잘 살핀다는 뜻을 품고 있다.

 

그럴 것 같은, 그러리라 짐작되는 사람을 만났다.

 

만났다고 해서 대면을 한 것은 아니고, 알게 되었다.

 

ZOOM으로 성탄절 예배를 드리고 난 뒤 목사님께서 광고 시간에 교회 지나갈 일이 있으면 들러서 밀폐 용기에 담긴 쌀을 한 통씩 가져가라고 하셨다.

 

목사님의 부연 설명에 의하면, 인도에서 선교사로 활동하시다가 일시 귀국하신, 일면식도 없는 어떤 선교사님께서 근처를 지나가다가 우리 교회를 보게 되었다고 한다.

 

허름하고 작은 2층 옥탑교회 사람들이 이 코로나 시국에 밥이나 제대로 먹을까 염려되셨는지, 성탄 선물로 20kg짜리 쌀 한 포대를 보내셔서 가정 수대로 나눴다고 한다.

 

목사님께서는 "인도에서 선교하시는 분이 더...."라며 말을 잇지 못하셨다.

 

말줄임표 속에는 처한 상황으로 봐서는 그 선교사님이 더 힘드실 거 같은데 왜 연고도 전혀 없는 교회에 이런 구휼미를 보내나 하는 안타까움과 혹시 배곯는 사람이 있을까 염려하는 따뜻한 마음에 대한 감사와 감탄이 들었으리라.

 

그 쌀 한 통을 들고 집에 왔더니 우리 집 '감자'가 웬 쌀이냐고 한다.

 

구휼미(재난을 당한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을 돕는 쌀)라고 했더니, 우리 집 형편이 그렇게 어렵냐며 웃었다.

 

 

 

 

일면식도 없는 인도 선교사님이 바로, 내 배가 고파 봤기에 남의 굶주림을 염려하는 분이 아닐까 하는 다소 섣부른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 떠오른 또 다른 인물이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의 '하선'이었다.

 

저잣거리의 천민 만담꾼에서 하루아침에 조선의 왕 대역을 하게 된 하선은 팔도 진미로 차린 수라상 음식을 싹싹 비운다.

 

 

 

 

그런데 수라간 궁녀들은 임금이 남긴 어식으로 요기를 한다는 것과 본인이 음식을 모두 먹어 치웠기에 궁녀들이 굶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하선은 몹시 미안해하고 난감해한다.

 

 

 

 

다음 수라상을 받았을 때는 팥죽 한 그릇만 먹고 나머지는 모두 남겨서, 수라간 궁녀들이 뜻밖의 포식을 할 수 있게 한다.

 

 

 

 

이 또한 배를 곯아 본 하선이기에, 수라간 궁녀들의 굶주림에 마음 아파하며 자신의 몫을 양보했을 것이다.

 

 

이름 모를 선교사님이 보낸 구휼미 한 포가 한문 속담 아복기포 불찰노기(我腹旣飽不察奴飢)를 소환하더니, 한 번 더 비틀어 적용할 기회까지 주니 감사할 뿐이다.

 

이 구휼미로 식혜를 만들면 너무 사치를 부리는 걸까?

 

독식하지 않고 여럿이 나눠 먹으면, 이 또한 올바른 구휼미 사용법이라고 믿고 내일은 식혜를 만들어야겠다.

 

 

 

2020/10/05 - 식혜 만드는 방법 황금 비율

 

식혜 만드는 방법 황금 비율

내가 식혜를 만들기 시작한 건 한 5년 전쯤부터이다. 어릴 때 명절이나 잔치에 먹었던 식혜는 달달한 맛과 함께 그 흥성스러운 분위기까지 녹아든 맛으로 기억해서인지, 언제 먹어도 맛있고 기

gettingwings.tistory.com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