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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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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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 

           

                          박노해

 

시간은 모든 것을 쓸어가는 비바람

젊은 미인의 살결도 젊은 열정의 가슴도

무자비하게 쓸어내리는 심판자이지만

 

시간은 아름다움을 빚어내는 거장의 손길

하늘은 자신이 특별히 사랑하는 자를

시련의 시간을 통해 단련시키듯

시간을 견뎌낸 것들은 빛나는 얼굴이 살아난다

 

오랜 시간을 순명하며 살아 나온 것

시류를 거슬러 정직하게 낡아진 것

낡아짐으로 꾸준히 새로워지는 것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

 

저기 낡은 벽돌과 갈라진 시멘트는

어디선가 날아온 풀씨와 이끼의 집이 되고

빛바래고 삭아진 저 플라스틱마저

은은한 색감으로 깊어지고 있다

 

해와 달의 손길로 닦아지고

비바람과 눈보라가 쓸어내려준

순해지고 겸손해지고 깊어진 것들은

자기 안의 숨은 얼굴을 드러내는

치열한 묵언정진默言精進 중

 

자기 시대의 풍상을 온몸에 새겨가며

옳은 길을 오래오래 걸어 나가는 사람

숱한 시련과 고군분투를 통해

걷다가 쓰러져 새로운 꿈이 되는 사람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

 

 

박노해 시인의 시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를 처음 읽었을 때, 차근차근 내게 보내는 위로의 말처럼 느껴져 마음이 따뜻해졌던 기억이 있다.

 

건축가 승효상도 이 시를 '더없이 평화하게 하는 이 아름다운 시'라  극찬하며 자신의 책의 서시와 제목으로 사용한 걸 보면 좋은 시는 나 같은 범인(凡人)이든 명성 있는 건축가에게든 각자에게 맞는 언어로  말을 건네나 보다.

 

오랜 시간을 겪어 본 사람은 더께로 얼룩진 물건에서 퇴적된 시간의 무게와 그 속에 새겨진 숨결을 느낀다.

 

더구나 그 물건에 자신의 손때가 묻어 있다면 그것은 그냥 물건이 아니라 그 자체가 삶의 기록이자 추억이 된다.

 

 

tvN의 '삼시 세 끼 어촌 편'에서 풍로를 보는 순간 나는 타임머신을 탄 듯 수십 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예닐곱 살로 돌아가는 매직을 경험했다.

 

금손 유해진이 '아뜰리에 뭐슬'에서 낡은 손풍로를 꺼내와서는 금손답게 강판으로 연통과 손잡이까지 뚝딱 만들어 '강력햐'라는 찰떡같은 이름까지 붙여 주는 게 아닌가.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녹이 잔뜩 슨 풍로를 보니 죽마고우라도 만난 듯한 반가움에 탄성이 나왔다.

 

 

나무로 군불을 때고 밥을 짓던 시절, 풍로는 생필품 중의 생필품이었다.

 

덜 마른 장작에 불을 붙이거나, 왕겨를 땔 때 없어서는 안 될 물건이었지만, 이게 다루기가 은근히 까다로웠다.

 

고무밴드가 잘 벗겨지므로 급하다고 너무 세게 돌려도 안 되고, 송풍구 쪽의 본체로 무게가 쏠려 있어서 손잡이가 달린 둥근 바퀴 모양을 잡으면 부러질 위험이 많았다.

 

그래서 아버지께서는 손풍로를 옮길 때는 반드시 송풍구 쪽에 달린 손잡이를 잡고 옮기라고 당부하셨다.

 

그렇지만 어른들의 당부를 기억해 내고 본체 손잡이를 잡기에는 바퀴 모양의 그 약한 굴레가 너무나 돌출되어 무심코 그곳으로 손이 먼저 가기 일쑤였다.

 

둥근 바퀴 쪽을 들다가 뚝 부러지기라도 하는 날엔 어른들의 불호령이 떨어지거나 등짝에 불이 나도록 맞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매일 불을 지펴야 하는데 다음 장날까지 손풍로 없이 지내야 하는 건 여간 갑갑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게 억울하기 짝이 없는 손풍로 사건이 있었다.

 

예닐곱 살쯤 되었을 때인 것 같다.

 

왕겨로 군불을 지피고 있던 오빠가 갑자기 나를 부르더니 풍로를 가져다 달라고 했다.

 

조금 전까지 풍로를 돌려 불을 때는 걸 봤는데 무슨 풍로를 또 가져오라고 하나 의아해하며, 풍로가 어디 있냐니까 할아버지 방 아궁이 앞에 있단다.

 

정말로 오빠가 불을 때던 아궁이와는 반대쪽에 손풍로가 떡하니 놓여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손풍로의 바퀴 부분에 손을 갖다 대는 순간, 반쪽이 뚝 떨어져 나갔다.

 

순간 아찔함과 동시에 그 어린 나이에도, 조금 전까지만 해도 풍로를 돌려 가며 불을 지피던 오빠가 왜 굳이 멀리 있던 나를 불러 풍로를 가져오라고 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이미 전적이 한 번 있었던 오빠는 이번에도 풍로를 부러뜨렸다고 하면 크게 혼날 것이 두려웠던 모양이었다.

 

나를 지켜보던 오빠는 쟤가 풍로 바퀴를 잡다가 부러뜨렸다고 큰 소리로 떠벌였다.

 

아버지가 걱정스레 다가오시는 걸 보자 난 억울하기도 하고 큰일이 났다 싶기도 해서 울음을 터트렸다.

 

늦둥이 막내딸이 안쓰러웠는지 아니면 오빠의 얕은수를 눈치채셨는지, 아버지는 바퀴는 잡으면 안 된다고 타이르시는 것으로 상황을 마무리해 주셨다.

 

그로부터 2,30 년쯤 지나 오빠한테 그 얘길 했더니 자기는 기억이 전혀 없다고 했다.

 

그래, 때린 놈은 잊었겠지만 맞은 놈은 생생히 기억하는 법이지.

 

 

그 후로 시골도 나무 대신 연탄아궁이로, 다시 기름보일러로 바뀌면서 풍로는 이름조차 까마득한 물건이 되었다.

 

그런데 그게 2020년에 유해진에 의해 '아뜰리에 뭐슬'에서 등장할 줄이야.

 

내 손때가 묻은 건 아니지만 그때 그 시절을 살았던 사람들에게 손풍로의 등장은 시간 여행으로의 안내자 역할을 톡톡히 했으리라.

 

손풍로와의 뜻밖의 조우로, 어디에선가 묵언수행 중일 오래된 것들의 아름다움에 대해 숭고함마저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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