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나의 점유이탈물 횡령 행위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사를 앞두고 짐 정리를 할 때였다.
어릴 때부터 읽던 책을 놓아주지 못하고 끼고 있던 아이 덕분에 책에 파묻혀 살다시피 했었다.
이사를 하게 되니 드디어 오래된 책들은 처분해도 된다기에, 복지관에 기부하거나 주변에 나눠 주고 나니 버리기 아까운 책장이 몇 개 남았다.
책장도 기부를 하려고 용달차에 짐을 싣는데, 어두컴컴한 도로변 낙엽더미 위에 떨어져 있는 비닐봉지에 든 뭔가가 눈에 띄었다.
주워서 보니 비닐봉투 안에는 새 것으로 보이는 점퍼가 들어 있었다.
이미 차가 한두 차례 밟고 지나가서 비닐봉지에 바퀴 자국이 선명히 새겨져 있었고, 언뜻 봐서는 영락없이 쓰레기처럼 보였다.
그냥 두고 가자니 차바퀴에 이리저리 치이다가 낙엽과 함께 쓰레기로 수거당할 것 같아 일단 내 차에 실었다.
책장을 주기로 한 곳에 짐을 부리고 돌아오면서 옷 봉지를 들고 집에 올라갔더니 점유이탈물 횡령죄라며 빨리 제 자리로 갖다 놓으라고 난리였다.
유실물, 표류물 또는 타인의 점유를 이탈한 재물이나 매장물 등을 횡령하여 성립하는 범죄이다(형법 제360조). 유실물(遺失物) · 표류물(漂流物)은 점유자의 의사에 의하지 않고 그 점유를 이탈하여 누구의 점유에도 속하지 않는 물건을 말한다. |
나는 상황을 설명하며, 있던 자리에 그냥 갖다 두면 쓰레기로 전락하기 십상이니 옷 주인에게 돌려줄 방법을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무슨 수로 주인을 찾아 주냐며 괜히 오지랖 넓게 굴다가 걱정거리 만들지 말라는 말이 돌아왔다.
내 행동이 점유이탈물 횡령죄에 해당한다는 건 인지하고 있었던 터라 이걸 어째야 하나 머리가 복잡해졌다.
있던 자리에 그냥 두고 오면 주인이 찾으러 올까, 아니면 쓰레기가 될까.
남의 사정 생각 말고 제 자리에 갖다 두고 신경 쓰지 말까, 이왕 이리된 거 주인을 찾아 줄까.
밝은 곳에서 자세히 보니 점퍼에 'SK매직'이라고 쓰여 있었다.
동양매직은 아는데 SK매직은 뭘까?
주인이 바뀌며 상호가 바뀐 걸 이때까지 모르고 있었다.
그렇게 불편한 마음으로 이런저런 궁리를 하다가 잠까지 설쳤다.
오지라퍼가 또 일 만들어 고생한다고 자책하며,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눈에 잘 띄게 A4용지에 매직으로 크게 꾹꾹 눌러썼다.
분실하신 분은 찾아가시고, 관계자 외엔 손대지 말라고.
그걸 습득했던 집 앞 도로변에서 잘 보이는 공동 현관 입구에 스카치테이프로 옷과 메모지를 함께 붙여 두었다.
뒷일을 종일 궁금해하며 저녁때 돌아와 보니, 점퍼는 없고 감사의 말과 연락처 남기니 꼭 연락 좀 달라는 내용이 적힌 A4용지가 붙어 있는 게 아닌가.
어찌나 반갑고 고마운지 다른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로 전화를 했다.
평소의 내 성격대로라면 있기 어려운 일이었다.
남자분이 전화를 받았다.
점퍼 붙여 놓은 사람이라고 했더니 반색을 하시며 꼭 통화하고 싶었다고 했다.
옷 주인은 SK매직 설치 기사님인데, 전날 유니폼을 받아서 운전석 옆자리에 두었다가 위층 비데 설치하러 오셨을 때 연장 가방 내리면서 떨어진 거 같단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오늘 아침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점퍼 받은 이후 일정대로 돌아보다가 찾게 되어 한시름 덜었다고 했다.
이사 가면 정수기를 바꿀 계획이었기에 여러 제품에 대해 알아보던 나는 혹시 정수기도 취급하시냐고 여쭸다.
물론이라고 하시며 SK매직 제품으로 산다면 직원 할인가로 해 주겠다며 제품 모델 번호를 알려 달라고 했다.
대~~~ 박!
이런 감사한 일이...
얼마 전 조카네 집에 갔을 때 새로 들인 정수기에 만족하며 잘 쓰고 있다길래, 동일 모델은 아니더라도 나도 그 브랜드로 사려던 참이었다.
조카한테 나의 이 점유이탈물 횡령 행위에 대해 얘기했더니, 조카는 자기네가 지금 쓰고 있고 내가 사고 싶다고 했던 제품이 바로 SK매직 정수기이지 않냐며 배를 잡고 웃었다.
어머나! 그래?
세상에 이런 일이...
감사하게도 그 기사님을 통해 할인된 가격으로 원하던 정수기를 들일 수 있었다.
설치할 때 기사님께서 직접 오시냐고 여쭸더니, 기사 배정은 서비스센터에서 하는 거라 배정을 받아 봐야 안다고 했다.
그 기사님이 오시길 바라며 감사의 마음을 담은 작은 선물까지 준비했는데, 아쉽게도 다른 분이 오셔서 직접 전달은 못했다.
이렇게 해서 나의 점유이탈물 횡령의 결과는 벌금이 아닌 뜻하지 않은 상금 아닌 상금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렇긴 해도 또 이런 일이 생긴다면 다시는 가져오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이 일을 계기로 점유이탈물 횡령죄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면서 별일이 다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영화 <돈을 갖고 튀어라>에서처럼 내 통장에 누군가의 실수로 돈이 입금되었는데 돌려주지 않아도, 잘못 배송된 남의 택배 물건을 갖고 있어도, 길에서 돈을 주워도, 택시나 버스에서 누군가 놓고 간 물건을 가져도 (가게 손님이 두고 간 물건을 다른 손님이 가져가면 그건 절도), 가게에서 거스름돈을 더 많이 받은 걸 알고도 돌려주지 않는 것 모두가 점유이탈물 횡령죄에 해당된다.
심지어 상가 화장실에서 습득한 휴대폰을 파출소에 갖다 주었는데, 휴대폰 주인이 고소하니 횡령죄에 해당되더라는 경험자의 사례가 있다는 걸 알고 나니 내가 얼마나 위험한 행동을 했었는지 뒤늦게 현타가 왔다.
점유이탈물 횡령죄는 최대 징역 1 년 또는 300만 원까지 처벌이 가능하다지 않은가.
내 호의를 호의로 받아들이고 더 큰 호의를 베풀어 주신 SK 매직 기사님이 참으로 고마웠다.
이런 인연으로 들여온 정수기는 우리 집에서 여전히 열일 중이다.
버튼 누르는 대로 나오는 찬물과 뜨거운 물에, 나의 범죄 행위를 선의로 받아들이고 호의까지 베풀어 주신 분에 대한 기분 좋은 기억까지 더해지니 물맛이 어찌나 좋은지 약수가 따로 없다.
새삼 감사한 마음에 정수기를 깨끗이 닦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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