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어느 날 어느 인터넷 사이트에서 본 광고에 눈이 번쩍 뜨였다.
독후감 대회 대상의 상금이 무려 1천만 원이었다.
아산재단 홈페이지에서 대회 참가를 하겠다고 이름, 이메일 주소, 전화번호와 같은 정보를 제출하면 해당 도서인 <이 땅에 태어나서>를 다운로드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 경제 분야에서 워낙 혁혁한 공을 세운 분이지만, 그분에 대해 정작 아는 것은 많지 않아서 이 기회에 책도 읽고 대회 출전도 해 보자는 생각에 신청했다.
PDF 파일로 읽으려니 너무 불편해서 책을 사서 읽었는데 정말 재미있었다.
자서전이니만큼 세간의 평가와는 다른 부분도 있겠지만,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 세계적인 그룹의 총수가 되기까지의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펼쳐졌다.
책을 펼치는 순간, 엄청난 에너지를 내뿜으며 여전히 발로 뛰고 있는 ‘현장의 사나이’를 만날 수 있었다.
그룹 회장, 명예 회장, 경제인으로 불렸지만, ‘건설인’으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을 잃지 않았던 아산의 삶 자체가 위대한 건축물다웠다.
자서전에는 그가 삶을 설계하고 기초공사의 과정을 거쳐 아산 정주영이라는 걸출한 건축물로 자신을 건설해 나가는 과정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었다.
강원도 통천의 가난한 집 장남으로 태어나, 타고난 성실함으로 밤낮으로 일했으나 먹고사는 것조차 녹록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서도 신문을 얻어 읽으며 바깥세상을 읽는 안목을 넓혔다.
성실하고 정직한 사람으로 신뢰를 얻으면 그것을 자본으로 삼아 자신의 생애를 얼마든지 확대, 발전시켜 나갈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이를 평생 최고의 가치로 삼아 실천해 나갔다.
정규 학력은 소학교 졸업에 불과하지만, 미래를 예측하는 통찰력, 모험심과 신념을 장착한 ‘생각하는 불도저’가 되어 자신의 삶을 설계했다.
최저 가격 입찰로 맡게 된 소양감댐 공사를 철근을 사용하는 콘크리트 중력댐 대신 주변에 널린 흙, 모래, 자갈을 이용하는 사력댐으로 설계를 변경하여 30% 가까이 국가 예산을 절감하면서도 튼튼한 댐을 건설하였다.
1백 미터가 넘는 댐은 전부 사력댐으로 건설하던 당시의 세계적인 추세와 건자재 확보의 수월성을 근거로 세계 굴지의 댐 건설회사인 일본 공영의 설계안을 변경해서 얻은 성과였다.
타성에 젖거나 기존 권위에 굴복하지 않고, 당시의 국내외 상황과 경제성을 치밀하게 따진 후 신념에 따라 모험을 감행하던 그의 경영 방식을 잘 보여 주는 사례이다.
이렇듯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모색하고, 필요하면 근본부터 바꾸는 도전을 통해 그의 인생 설계도는 점점 확장되고 정교해졌다.
기초공사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가 사람을 중시하는 인본주의자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다.
직위는 일을 잘하기 위해 주어지는 책임일 뿐, 일이나 사람의 경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그의 만인 평등사상은 당시 기업 총수로서는 보기 드문 선구자적 가치관이었다.
공사 현장을 감독할 때는 ‘호랑이’로 불릴 만큼 무섭게 몰아치다가도, 야유회에서는 사원들과 격의 없이 어울리며 노래를 부르고 팔씨름하는 모습에서 소탈한 소시민 아산을 만날 수 있었다.
현대건설의 개인 주식 50%를 기부하여 아산사회복지재단을 설립한 것도 병고와 가난으로부터 사람을 구제하려는 그의 인본주의 가치관의 발로였다.
이러한 사람에 대한 애정은 나라로까지 확대되어 강한 애국심으로 나타난다.
경부고속도로와 발전소 건설로 국내 기간산업의 근간을 마련하고, 중동 건설로 외채를 해결해 국가에 보탬이 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겼다.
세계 IOC 위원 82표 중 기껏해야 서너 표 정도 득표하며 완패할 거라던 서울 올림픽 유치전에 뛰어들어, 전력투구 끝에 52:27로 나고야를 제치고 최종 선정되도록 활약한 것도 아산이다.
나라가 잘살아야 개인도 부유해진다는 그의 평소 신념으로 이룬 결실이었다. 신용과 성실을 기업가의 기본 덕목으로 삼고 실천하다가 어렵게 일군 사업이 큰 타격을 입기도 했다.
6·25 전쟁 후 천정부지로 치솟는 물가와 장비 부족, 건설 현장에 대한 이해 부족 등으로 조폐공사와 고령교 공사에서 막대한 적자를 내면서도 끝까지 책임지고 공사를 마무리한다.
그때 생긴 부채로 오랜 세월 발목이 묶이지만, 그렇게 처절하게 지켜낸 현대건설의 신용은 정부 공사 수주로 돌아왔다.
이러한 사람과 나라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성실과 신용을 좌우명으로 삼은 아산의 경영 철학은 웬만한 내우외환에는 끄떡도 하지 않게 자신과 현대를 우뚝 세우는 단단한 초석이 되었다.
미래 지향적인 통찰력으로 자신을 설계하고, 인본주의와 애국심, 신용과 성실을 경영의 근간으로 삼았던 아산은 기발한 창의력과 기지, 진취적 기개와 불요불굴의 개척정신을 자재로 자신을 종합 건축물로 건설해 나갔다.
쌀가게인 복흥상회의 점원으로 시작해 아도서비스와 현대자동차공업사, 현대토건사와 현대자동차를 거쳐 현대건설, 현대조선(현대중공업), 현대양행 등 산업 전반으로 사세를 확장하여 오늘날의 세계적인 현대로 일궈 내었다.
그 과정에서 발휘된 기발한 창의력과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개척정신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아산 정주영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영국 버클레이즈 은행 차관으로 울산에 조선소를 건설하고 26만 톤급 배 두 척을 진수한 일이다.
가진 것이라고는 조선소 부지 백사장 사진과 5만분의 1 지도, 스코트 리우고스에서 빌린 26만 톤급 유조선 도면이 전부였다.
차관을 내어 주면 그 돈으로 땅을 사서 조선소를 짓고 배를 만들어 팔겠다는,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발상을 현실화하였다.
그 과정에서 절체절명의 순간에 500원짜리 지폐의 거북선을 펼쳐 보이며 우리는 1500년대부터 철갑선을 만든 나라임을 상기시키는 기지를 발휘한다.
전공이 무엇인지 묻는 버클레이즈 은행 해외 담당 부총재의 질문에 옥스퍼드 대학에서 자신의 사업계획서를 한 번 들춰보더니 그 자리에서 경영학 박사 학위를 주더라고 대답해 상대를 무장 해제시키는 유머는 또 얼마나 재치 있던지.
그의 기발한 창의력은 천수만 간척사업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바윗덩어리를 순식간에 쓸어가는 초속 8m의 유속을 유조선으로 막는 정주영 공법으로, 여의도 면적의 33배에 달하는 국토 면적을 넓혀 국내외의 주목을 한 몸에 받기도 했다.
그렇다고 그의 길이 항상 탄탄대로만은 아니었다.
현대자동차 공장을 건설한 지 6개월 만에‘코티나’를 생산했지만, 우리나라 비포장도로에 맞지 않아 실패로 끝난다.
그러나 아산은 중도 하차란 자신의 사전에 없다며, 산업기술의 척도이자 달리는 국기(國機)인 자동차 산업에 땀과 정열을 쏟아부어 100% 국산 자동차 1호인‘포니’를 생산하게 된다.
자동차가 미래의 주종 사업 중 하나가 될 것이라는 천리안으로 막대한 투자와 노력을 쏟아부은 덕분에 오늘날‘현대자동차’가 그룹의 가장 중요한 기업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세계적인 건설업체들과의 경쟁 끝에 수주를 따낸 주베일 공사에서 외국 장비를 빌려 쓰자니 거금이 들면서도 작업 진도는 더뎠다.
공기 단축과 비용 절감이 승부 요인이라 판단한 그는 10층 빌딩 규모의 자켓 89개를 울산에서 제작해 바지선으로 주베일까지 12,000km를 19항차를 하는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길이 막히면 뚫고,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목적지에 도달하고야 마는 불요불굴의 개척정신과 번뜩이는 창의력으로, 골리앗 크레인보다 더 힘차고 높이 자신과 현대를 건설한 아산 덕분에, 우리나라도 국제무대에 당당히 설 수 있었다.
아산은 육중한 쇠뭉치 몸집으로 마음먹은 일은 밀어붙이고야 마는 추진력 때문에‘불도저’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러나 속은 한없이 부드럽고 따뜻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일화가 몇 가지 있다.
대가족 속에서 시집살이하는 제수들이 안쓰러워, 단성사에 새 영화가 들어오면 여동생과 두 제수를 데리고 영화 구경을 하러 가서 외식까지 시켜 주었다고 한다.
바깥일을 하는 남편을 위한 아내의 희생적인 내조를 당연시하던 시절이었기에, 아산의 이러한 섬세한 배려심이 돋보였다.
바덴바덴에서 서울올림픽 유치 활동을 할 때는 IOC 위원 방에 장미 꽃바구니를 보내어 위원들로부터 많은 감사 인사를 들었다고 한다.
꽃을 선물할 줄 아는 ‘호랑이’ 아산은 이처럼 내유외강의 성품을 지닌 사람이었다.
양복 한 벌을 족하게 여길 만큼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도, 도시락도 못 갖고 출근해 점심을 굶고 일하는 기능공들이 안쓰러워 업계 최초로 회사에서 점심을 제공하는 것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면면들을 보니‘현대’라는 세계적인 기업을 일궈낸 창업자이자 한때 우리나라 최고의 부자였던 그가 나와는 다른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라 많은 사람을 품고 함께 호흡하는 온기 있는 이웃으로 느껴졌다.
아산의 자서전 <이 땅에 태어나서>를 통해 그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니, 그의 성공에 나도 빙의된 듯한 착각이 들면서 새로운 일에 도전해 보고 싶은 의욕이 솟았다.
그가 살던 시대와 지금은 확연히 다르면서도 한편으로는 비슷한 면이 있다. 코로나 19로 인해 개인의 일상은 물론이고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재편이 이루어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 흐름을 잘 읽고 대응한다면, 새로운 기회가 열릴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새로운 기회라는 것을 내가 만들기나 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 때, 아산의 발자취를 통해 삶을 경영하는 자세를 배운 것은 나에게 하나의 기회가 되었다.
요즘은 성공한 사람의 척도로 눈에 보이는 성과, 그중에서도 특히 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는지를 꼽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땅에 태어나서>에서 아산은 자신의 인생 설계 방법과 삶의 원칙, 기업 경영에서 중시했던 가치와 그 실현 방법 등 결과보다는 거기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들려주고 있다.
누구나 정주영 같은 부자가 될 수는 없을지라도, 누구나 정주영으로부터 삶을 경영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는 지혜를 배울 수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간이라는 자본을 더 많이 가진 젊은이들이 이 책을 읽고, 자신의 자본을 잘 활용하여 인생을 튼실하게 건설하는 방법을 아산으로부터 배울 수 있기를 바란다.
<이 땅에 태어나서>에 나타난 아산 정주영의 삶을 돌아보니 그는 자신뿐만 아니라 ‘현대’와 이 나라를 세워나간 명실상부한 ‘건설인’이었다.
비록 육신은 이 땅을 떠났으나 우리나라 근대화와 경제 발전의 주역이었던 그의 정신과 업적은 이 시대[現代]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오래도록 회자될 것이다.
책이 재미있어서 술술 읽혔다.
이왕 책을 읽었으니 독후감을 써서 출품까지 했다.
심사 결과 발표 일정에 대한 공지는 따로 없었기에, 아산의 20주기 추모일인 3월 21일 며칠 전에는 결과 발표를 하겠지 하고 막연히 추측만 할 뿐이었다.
그런데 어제 오전에 문자가 한 통 날아왔다.
<아산재단 독후감대회 심사 결과 안내>라는 제목에 순간 '혹시?'와 '설마'가 순식간에 교차했다.
나에게는 수상의 기회를 주지 못하였으니 많은 이해를 부탁한다고.
"암요.
이해하다마다요.
쟁쟁한 사람들이 오죽이나 많이 출품했겠어요."
아무나 흉내내기 어려운 번뜩이는 창의력과 놀라운 추진력으로 성공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이 나에게는 이미 값진 선물이자 상이었다고 생각하니 아쉬움이 달래진다.
어떤 사람이 수상했을까 궁금해서 검색해 봐도 심사 결과 발표는 어디에도 없다.
아직 공식 발표는 안 했나 보다.
혼자만의 착각인지는 몰라도 이게 또 좀 감동이다.
심사 결과를 먼저 발표하기 전, 참가자에게 수상 여부를 미리 개별 공지한 후 시차를 두고 공식 발표를 하는 것에서 왠지 배려받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아산 정주영의 20주기 추모일에는 나도 추모의 마음을 보태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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