털레기를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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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털레기를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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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지도 않은 식구인데 원하는 저녁 메뉴는 제각각이다.
 
치킨으로 겨우 합의를 보고 배달 앱으로 주문했지만, 나는 이미 딴마음을 먹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고기보다는 채소가 좋고, 여러 재료가 들어간 음식보다는 주재료의 맛을 느낄 수 있는 단출한 음식이 더 당긴다.
 
며칠 전 밀푀유 나베에 넣어 먹으려던 칼국수 면을 배가 불러서 못 끓여 먹고 냉장고에 넣어 두면서, 털레기를 해 먹겠다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털레기를 처음 알게 된 건 올케언니를 통해서였다.
 
사회 초년생 시절 오빠네서 더부살이할 때, 어느 휴일 저녁에 올케언니가 저녁에는 털레기나 해 먹어야겠다고 했다.
 
'털레기'라는 단어를 그때 처음 들었던 나는 '털 내기'라고 들었고, "무슨 털을 내요?"라고 반문했다.
 
둘이서 배를 잡고 웃었던 그 날 이후, 언니와 나 사이에서는 "털을 좀 낼까요?" 하면 털레기를 하겠다거나 먹고 싶다는 의미로 통했다.
 
음식 솜씨가 둘째가라면 서러운 언니가 끓여 낸 털레기는 별스러운 재료 없이도 따끈하게 속을 풀어 주는 별미로, 쌀쌀한 날이면 생각나는 추억의 음식이 되었다.
 
소박한 재료로 속까지 뜨끈하게 해 주는 털레기가 10년을 함께 살면서 얼굴 한 번 붉힌 적 없었던 심성 곱고 수수한 올케언니와 닮은 음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털레기는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없는 단어이다.
 
온갖 재료를 털털 털어 넣어 만든 음식이라고도 하고, 음식을 싹싹 털어먹어 치운다는 뜻의 이북 말이라는 설이 있다고 오픈 사전에만 실려 있을 뿐이다.
 
털레기는 주로 국수로 끓이는데, 수제비를 넣으면 털레기 수제비가 되고, 미꾸라지를 넣으면 미꾸라지 털레기가 된다.
 


털레기 재료

칼국수면 1인분

감자 한 개

양파 1/4 개

신김치 한 종지

대파 1/2 쪽

참치액젓 한 숟가락

 
오늘은 최소한의 재료만 넣어 20분 내로 조리하기 위해 멸치 육수 대신 참치액젓을 사용하였다.
 
냄비에 물 800mL를 받아 다시마 두 장을 넣고 불에 올려 끓인다.
 
양파 1/4은 채를 썰고 껍질을 깐 감자 한 개는 납작 썰기, 신 김치는 송송 썰어 냄비에 넣고 팔팔 끓인다.
 
감자가 익을 정도로 끓으면 다시마는 건져내고, 칼국수 면을 넣은 후 참치액젓으로 간을 한다.
 
참치액젓은 간편하게 국물 맛을 내고 싶을 때 아주 유용하다.
 
모든 재료가 다 익으면 마지막으로 대파를 넣고 그릇에 담아낸다.
 
조금 더 풍성한 맛을 내고 싶으면 처음에 건새우를 한 줌 넣거나, 불 끄기 전에 기호에 맞는 해산물을 넣으면 된다.
 
 

 
 
이게 얼마 만에 먹는 털레기인지 기억조차 가물거리지만, 얼큰하면서 깔끔한 국물이 속까지 확 풀어 주어, 먹고 나니 추워서 움츠러들었던 어깨가 쫙 펴지면서 진수성찬 못지않은 만족감이 느껴진다.
 
재료 본연의 맛을 느낄 수 있는 소박한 음식이 갈수록 좋아지는 것을 보니, 나이가 들긴 드나 보다.
 
밀가루 반죽에 소금만 살짝 넣고 부친 배추전을 쭉쭉 찢어 먹으면 고급 스테이크가 부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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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것은 나만의 식성이기 때문에 가족을 위해서는 그럴듯한 가니쉬를 곁들인 스테이크도 구워내고, 꽃처럼 피어나는 밀푀유 나베로 눈도 입도 만족스럽게 하며, 이틀을 꼬박 들여 꼬리곰탕을 끓여내기도 한다.
 
오늘처럼 치킨을 시켰을 때나 혼자 끼니를 해결할 때만 내 식성대로 먹을 수 있는데, 이 소박한 음식에 열광하는 나는 내가 봐도 어쩔 수 없는 시골내기이다.
 
텔레비전이나 블로그, 유튜브를 보면 이름조차 생소한 이국적인 재료로 만든 현란한 음식이 넘쳐난다.
 
엄청난 양과 질의 재료를 동원해 긴 시간 정성을 다해 요리해서 예쁘게 담아내는 솜씨가 감탄스러울 정도이다.
 
온갖 재료가 어우러진 고칼로리 음식은 그것대로, 최소한의 재료로 끓여낸 소박한 털레기는 털레기대로 훌륭한 한 끼 식사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새삼 감사하다.
 
나이 들수록 치장하지 않아도 나만의 개성과 인간미를 드러낼 수 있는, 털레기처럼 담백한 사람이 되고 싶다.
 
흡족한 음식을 먹고 나니 갑자기 개똥철학자라도 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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