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은 20장 31절에서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을 밝히면서, 이 복음서를 끝내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고 21장에서 에피소드 하나가 더 이어집니다. 마치 영화가 끝나고 자막이 올라간 후에 나오는 쿠키 영상처럼요. 21장에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세 번째로 일곱 제자에게 나타나시고, 베드로에게 사도로서의 중책을 맡기시는 내용이 이어집니다. 베드로를 포함한 일곱 제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자, 제자로 부름을 받기 이전의 생업이었던 어부로 돌아가 디베랴(갈릴리) 호수로 물고기를 잡으러 갔습니다. 3년 동안 손을 놓아서 감이 떨어졌는지 밤새도록 한 마리도 못 잡고 날이 새는데, 육지에서 누군가가 배의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합니다. 그대로 했더니, 그물 가득히 백쉰세 마리의 물고기를 잡게 됩니다.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사랑하는 제자의 말을 듣자마자 성질 급한 베드로는 바다로 뛰어내립니다. 제자들은 육지에 올라가 예수님께서 숯불을 피워 구우신 생선과 떡으로 조반을 먹게 됩니다. 요한복음 21장 15~19절 말씀은 이 아침 식사 후 나눈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입니다. 이 글은 여기에 나오는 '내 양을 먹이라'는 말씀의 의미에 대해 묵상한 내용입니다.
먼저, 15절의 ‘조반 먹은 후에’라는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은 밤새 고기잡이로 허기졌을 제자들에게 손수 준비하신 조반을 먹이셨습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 목사님께서 교회에서 예배 후에 맛있는 것을 나눠 먹는 게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던 것이 다 성경적 근거가 있었구나 싶었습니다. 지난주 설교에서는 제사 음식을 나눠 먹는 것이 라반과 야곱 사이에 맺은 언약을 축하하고 기뻐하는 의미라는 것도 새로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친 제자들에게 손수 준비하신 음식을 먹이시는 것을 보면서, 허기진 사람에게는 그 어떤 말보다 먹을 걸 주는 게 찐 사랑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배고픈 사람을 보면 먹을 것을 나눠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년 5월에 집에 에어컨 설치를 했는데 설치 기사님 두 분이 예정보다 일찍, 12시 좀 넘어서 오셨더라고요. 2 in 1이라 설치하려면 적어도 서너 시간은 걸릴 텐데 점심 식사를 안 하셨다길래 컵라면에 김치, 밥 한 공기씩 준비해서 드렸더니 얼마나 시장하셨던지 국물까지 깨끗이 드셨습니다. 후식으로 커피까지 마시고 에어컨을 설치하는데, 배수관 부분이 막혀서 추가 작업까지 하느라,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시간은 시간대로 걸려 다섯 시간 만에 끝냈습니다. 그런데 기사님이 갑자기 설치한 배관을 뜯어내더니 새 관에 테이핑을 다시 하셨습니다. 코너를 돌면서 관이 살짝 꺾였는데 혹시라도 나중에 꺾인 부분에 문제가 생길까 봐 다시 설치하겠다면서요. 에어컨은 배관 길이에 따라 설치 비용이 달라집니다. 그런데 제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 약간의 꺾임이 있다고 새 관으로 다시 설치한 겁니다. 이때, 일은 밥심으로 한다더니, 컵라면이라도 드리길 잘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에어컨 설치를 잘 끝냈습니다.
‘조반 먹은 후에’라는 말씀 이후를 자세히 보니, 베드로는 이 아침밥을 먹고 밥값을 제대로 했더라고요. 복음 전파를 위해 살다가 십자가에 못 박혔으니까 이때 먹은 밥값으로 목숨까지 내놓은 셈이지요. 그때 에어컨 설치 기사님도 제가 의도하지도, 요구하지도 않았지만, 자진해서 컵라면 하나에 대해 과도하게 밥값을 기꺼이 치르셨더라고요. ‘누구나 밥을 먹으면 밥값을 하는구나.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밥값을 해야 하나?’ 이런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채워 주시는 하나님께, 제가 벌어먹고 살고 있는 이 사회에 대해서, 게다가 우리한테 많은 것을 베풀어 주는 자연에도 밥값을 해야겠더라고요. 저는 베드로 같은 믿음은 못 돼서 목숨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떻게 밥값을 해야 할지 계속 고민하고 있습니다.
조반을 먹은 후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는데, 저는 전부터 이 구절에 대해 두 가지 의문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이 문장은 이중적인 의미를 담고 있어서 국어 문법적으로는 비문인데 둘 중 어떤 의미일까 하는 것입니다. 하나는 ‘이 사람들과 나 중에서 누굴 더 사랑하느냐(대상 비교)’라는 의미일 수 있고, 다른 하나는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네가 더 나를 사랑하느냐’(사랑의 정도 비교)는 것입니다. 후자의 의미로 해석했을 때, 두 번째로 드는 의문은 왜 예수님은 굳이 다른 제자들과 비교해서 예수님에 대한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하셨을까 하는 점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놀랍게도 다 이유가 있더라고요. 베드로가 평소에 남과 비교하는 말을 자주 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6장 33절에서 베드로는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주를 버리지 않겠나이다.”하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 이후 20절에서도 베드로는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 말씀에 예수님의 사랑하는 제자도 따르는 것을 보고, 그는 어떻게 되냐고 묻다가 주님께 핀잔을 듣습니다. 이렇게 베드로는 누군가와 비교하는 말을 자주 했습니다. 예수님은 일종의 미러링처럼 베드로의 평소 화법이나 말하던 내용대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던 겁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저에게 물으신다면 어떻게 물으실까 생각해 봤습니다. 저는 하박국 3:17~18 말씀을 좋아합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하박국은 비록 지금은 구원이 지연되고 있지만, 하나님의 구원의 때는 확실히 올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할 수 있다고 노래합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에 미치기엔 제 믿음이 턱없이 부족하지만, 저도 그런 믿음을 갖게 해 달라고 기도하곤 했습니다. 2020년과 2021년은 코로나로 인해, 많은 사람이 그랬듯이 저도 힘든 한 해였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저에게 물으신다면 “네가 평소에 좋아한다던 하박국처럼, 어렵고 힘든 지금, 이 순간에도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실 것 같았습니다. 그러면서 저 자신에게 ‘나는 이 순간 주님을 사랑하는가?’ 수시로 묻게 되었습니다. 일이 잘 풀릴 때만 때때로 뜨문뜨문 주님께 감사하고 주님을 사랑한 건 아닐까 하는 반성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그런 질문을 저 자신에게 하는 동안만큼은 주님을 생각하고 말씀을 묵상했으니 그 자체가 은혜라는 생각이 들어 감사했습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한 베드로의 치명적인 약점이 오히려 주님의 도구로 사용된 것이 저에게 큰 위안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3년 동안 동행하며 예수님을 직접 경험한 사람입니다. 마태복음 16장 18~19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직접 베드로라는 별명을 지어 주시면서, 그 위에 주님의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셨습니다. 천국의 열쇠까지 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변화하는 모습까지 목격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실수 없이 베드로가 예수님의 사도로 살아갔다면, 어쩌면 예수님보다는 예수님과 함께했던 자신을 전하는 우를 범했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예수님을 3년이나 따라다니면서 기적을 행하시는 것을 다 본 증인이야. 내가 땅에서 무엇이든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고 하셨어.” 하면서요.
그런데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베드로는 그 치명적인 실수와 잘못으로 인해 예수님 앞에서 납작 엎드렸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예수님의 물음에 17절에서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이 부분을 예수님은 앞의 두 번의 질문에서 신의 선택적인 사랑을 뜻하는 ‘아가파오’로 물었는데, 베드로는 우정이나 인간적인 사랑인 ‘필레오’로 대답하니까, 결국 예수님도 마지막 질문에서는 필레오로 물으셨다고 해석하기도 하던데요, 저는 사랑이라는 단어보다는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라는 베드로의 말씀에 더 꽂혔습니다. 베드로는 마태복음 16장 16절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놀라운 믿음의 고백을 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잡으려던 병사 마고의 귀를 베어 버릴 정도로 다혈질이기도 했습니다. 이랬던 베드로가 오늘 본문 말씀에서는 평소와 달리 굉장히 의기소침해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느냐는 똑같은 질문을 세 번째 하실 때는 근심까지 합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평소와는 달리 소심하게 주님께서 모든 것을 아신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누가복음 22장 61~62절에서 찾았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니 닭이 울었고, 그 후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 심히 통곡하니라’라는 말씀을 보면, 베드로는 예수님께 딱 걸렸습니다.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자마자 예수님과 눈이 마주쳤고, 그때서야 자신이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할 거라는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다 알고 계셨다는 걸 깨닫게 된 순간입니다. 그러니 무슨 면목이 있었겠습니까. 결국 예수님 앞에 납작 엎드릴 수밖에 없었고, 그런 베드로에게 주님은 당신의 어린양을 맡기셨습니다. 여기에서 인간의 결점과 잘못도 일꾼으로 쓰임 받을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 잘못이나 실수 자체보다는 그것을 처리하는 태도가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서든 사람 앞에서든 잘못은 최대한 빨리 인정하고 진심으로 사죄하며, 비슷한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실천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는 걸 매일 느낍니다.
마지막으로, '내 (어린) 양을 먹이라(치라)'는 말씀에서 ‘내 양’이라는 말씀이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내 양’이 아니라 ‘주님의 양’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동안 저는 제가 먹여서 젖도 짜고 털도 깎을 수 있는 내 양만을 먹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묵상하다 보니 내가 낳고 길렀으니 내 양인 줄 알았던 내 자식도 주님의 양이고, 가족도 주님의 양이더라고요. 우리 교회 성도님들은 물론이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심지어 무고한 사람에게 해를 가한 사람까지도 주님의 양이라네요. 그런 사람들을 먹이고 치는 것이 주님을 따르는 자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하십니다. ‘저는 못 하겠는데요?’ 하는 말이 저절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뒤 이어지는 18절 말씀에서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하시면서 19절에서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따르는 것은 내가 가고 싶은 대로 내 마음대로 가는 길이 아니라, 원치 않아도 주님께서 가셨고 저에게도 가라고 명령한, 가야 할 길이기에 가는 거구나 하는 것을 마음으로 깊이 느꼈습니다. 그러고 나니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것까지는 아니어도, 상대에 대한 안 좋은 감정이 들거나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을 만났을 때, ‘저 사람도 주님의 양이겠지요?’ 하는 질문은 하게 되었습니다.
사랑에 대한 정의는 다양합니다. 성경에서는 오래 참고 온유하며 시기하지 않으며 자랑도 교만도 아니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대중가요에서는 눈물의 씨앗이라도 하고요. 사람마다 사랑에 대한 정의는 다를 겁니다. 저는 본문 말씀인 요한복음 21장 15~19절 말씀을 묵상하면서, 사랑은 추상명사가 아니라 하나님이나 부모님, 친구와 이웃, 사회로부터 받은 것을 다시 누군가에게 돌려주는 구체적 행동을 동반하는 동사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때로는 그 대상이 되는 누군가가 나와는 무관한 사람이거나 심지어는 나를 넘어지게 하려는 사람이어도, 주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행동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가 그렇다고 대답하니 ‘내 양을 먹이라(치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한다면 누군가를 먹이는 구체적 행동을 하라는 말씀에 이제는 제가 행함으로 대답할 때라는 걸 알게 하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한 말씀을 오랜 시간 공부하고 묵상하다 보니, 새로운 것이 보이고 들리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이 말씀에 집중하다 보니 다른 말씀과도 연결되어 뻗어 나가더라는 것입니다. ‘성가심을 이기는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아가 5장 2~9절을 본문으로 한 주일설교에서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에 몸으로 답해야 한다’는 말씀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때 제가 그 부분에 집중하고 있었거든요. 그리고 또 다른 설교에서 베드로 이야기가 나올 때나, 자연을 회복시키기 위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해 봐야 한다는 묵상지를 볼 때도, 이 말씀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어서 반가웠습니다. 성경 안에서 모든 말씀은 통한다는 걸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목사님께서 잘 차려 주신 밥상에서 숟가락 들고 먹기만 하는 것도 좋지만, 제가 직접 재료를 다듬고 씻어서 밥상을 차려 보는 것도 한 번쯤은 해 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해만큼 나무의 나이테가 자라듯, 뽑은 말씀을 한 해 동안 읽고 묵상하면서 저도 나이테 하나 정도는 자랐기를 기대해 봅니다. 말씀 안에서 말씀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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